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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이래경, 그는 누구인가? 민주당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치판 자체를 혁신할 사람 / 홍영표, 이상민, 김종민, 송갑석 등의 수박들을 어찌할 것인가?

행동사건인터뷰(behavioral event interview, BEI)

민주당의 혁신위원장으로 임명된 이래경 선생님은 김근태,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을 지원하며 지금까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당이 발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래경 선생님이 사의를 표명하면서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인터뷰를 했으며, 최근에는 이래경 선생님이 자신을 악마화해서 마녀 사냥하듯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 문제라는 얘기를 했다.
이래경이라는 사람에 대해 궁금해져서 여기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나는 제가 일하는 기업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과 무능한 사람들을 알아보고, 그 후에 한국은행을 떠났어요. 한 3년 동안 작업을 하고, 그 작업이 어떻게 시장에 알려졌는지 알게 되었고, 그래서 컨설팅 펌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함께 나와서 주로 기업과 정부, 큰 조직들과의 업무를 처리하였습니다. 작은 조직들도 일부 다루었습니다만요.
그래서 2014년에 은퇴한 이후에는 정치인들의 능력과 무능력을 평가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정치가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썩었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그동안 배웠던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뭔가 우리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느냐 해야 되겠다. 이렇게 해서 이제 시작했던 거죠. 그래서 여기까지 왔는데 사실 이 분야는 내 전문 분야예요.
조직 설계하고 인재들의 유능함과 무능함을 분별해서 어디다 어떻게 모임하는 게 좋겠다 하는 것을 하는 게 제 전문 분야니까 그래서 이거를 기업에서만 하지 말고 공직사회에서도 하자.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왔죠. 그래서 이 역량 진단하는 방법론을 일반인들도 알 수 있도록 제가 책을 썼다는 것은 이 강의를 들어오신 분들은 잘 알고 그 책을 통해서 그대로 하면 돼요. 이미 10년 전서부터 제가 이걸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방법론을 우리 형편에 맞도록 만들어서 하는 거니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최근에, 갑자기 민주당의 혁신위원장으로 이래경 선생님이 추천되어 그 자리에 취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이재명이 이런 배경을 갖고 혁신위원장으로 선임한 건가요?
이 일은 정말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나는 이래경 선생님을 잘 알지 못했지만, 어떤 분이신지는 알고 있었고 한 번 만난 적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혜경 선생님은 개인적으로는 잘 몰랐지만, 김근태라는 인물은 대한민국에서 알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분이었거든요.
나는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 운동에는 참여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요. 그래서 유신 시대에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그 후에는 전두환 시대에 한국은행에서 근무했었어요. 그러니까 무슨 민주화 운동이라던가 노동 운동 같은 건 아주 멀리 떨어진 사람이었다고 말이에요.
퇴직 후에는 가끔 우리나라 사회에 대해 인터넷이나 페이스북, 블로그 등에 조금 글을 쓰곤 했어요. 현재는 그런 활동을 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그곳에 글을 써서 내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어요. 사회적인 문제에 분노가 생기면 글을 써서 표현하기도 했죠.
그래서 이재명이 이래경 선생님을 혁신위원장으로 임명한 것을 보면, 이재명이 사람을 평가하는 시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도 깜짝 놀랐다고요. 이제는 좀 더 민주당이 혁신될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이래경 선생님과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어요. 어떻게 만났냐고 묻는다면, 내가 글을 쓴 거예요. 페이스북에 글을 쓰고 그 글을 읽은 것 같더라구요. 그 사람인 이래경 선생님이. 그래서 그 다른 백년이라는 사이트를 2016년 정도에 만들었어요.
2016년이었나 17년이었나 그 때 내가 쓴 글을 그 다른 백년 사이트에 칼럼으로 올리겠다는 거였죠. 그래서 그렇게 연락이 왔어요. 나는 다른 백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어요. 그래서 다른 백년이라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댓글을 달겠다니, 아무데나 달 수도 없고. 그래서 다른 백년이라는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좋은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의 칼럼이 쭉 있는 거예요.
그 사람들의 이름에 내 글도 올려줄 거라고 해서요. 그래서 뭔가 그렇게 해보라고 하셨는데, 나는 정확히 무슨 일인지 모르기 때문에 사무실을 찾아갔어요. 그곳에 가서 보니 활기차게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가서 얘기도 해보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여기에 글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 이름과 뭐 그 교수들 이름이 있는 거 보면 와서 칼럼도 쓰고 연구소도 만들어서 연구도 하고 그래요. 근데 그걸 다 이래경 선생님이 자기 사제들을 털어서 하는 거라는 거예요. 그 사람은 돈을 많이 번 사람이에요. 나는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고, 이제 나이도 들었으니 돈을 많이 벌어도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계속 칼럼을 쓰지 않았고, 글을 쓰려면 분노를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서 몇 번 하다가 그만뒀어요. 지금 가서 내 글이 있는지 찾아보니 내 글이 있는 홈페이지도 여러 번 바뀌었고, 그래서 내 글은 없었어요.
그런 관계였어요. 그리고 나는 글을 정기적으로 쓰지 않았고 다른 일도 하면서 글쓰기도 시들해져서, 다른 백년과는 관련이 없었어요. 그냥 다른 백년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죠.
하지만 이래경 선생님이 혁신위원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민주당이 제대로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래경 선생님은 훌륭한 분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김근태,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을 지원하며 지금까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너무 기뻤어요. 민주당이 살아나게 될 것 같았고, 정치의 판도도 제대로 돌아갈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 분이 사의를 표명하면서 나는 너무 실망했고,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이혜경 선생님께 전화를 해서 인터뷰를 하자고 제안했어요. 그래서 만나서 인터뷰를 했어요.
그리고 모처에서 만나가지고 한 두 시간 반 정도 인터뷰를 했습니다. 근데 어제 저녁에 더 탐사하고 시민 언론 민들레하고 합동 방송하는데 나가셨더라고 나가셔서 거기서 자신이 이야기를 왜 언론이 그렇게 십자포화를 자기한테 말하자면 악마화해서 마녀 사냥하듯이 그렇게 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 잘못됐는지 그것을 소상히 밝히는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내가 그걸 두 번이나 들었는데 어제 듣고 어제 본 방송에 듣고 오늘 아침에 다시 들었어요.
그래서 이제 오늘 강의를 조금 이제 거기서 했던 거는 줄이고 내가 인터뷰하면서 사태 파악한 것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면서 얼마나 훌륭한 인물인지 민주당이 이래경을 놓친 것은 아마 민주당의 역사에 가장 후회하는 장면이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죠. 그래서 오늘 방송을 이걸 해야 되겠다 마음을 먹었습니다.
국제사회적인 관점도 아주 특별한 분이에요. 일반 신문 기자 이 기자들하고 완전히 달라요. 그리고 또 국제정치학을 하시는 분들과도 또 맥이 달라요. 그러니까 이분은 평생을 사실 비즈니스를 해오시는 분이니 그러니까 관점이 다르죠. 일반 학자들 국제정치학을 하시는 분들하고도 관점이 달라요.
그래서 오늘 이야기는 내가 역량 진단을 하는 사람으로서 인터뷰하는 스킬이 있어요. 다 내가 16강에서 이미 다 여러분들한테 소개를 했는데 그것에 의해서 내가 뽑아낸 이래경이 어떤 사람인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해보려고 해요.
그래서 국힘당도 좋아요. 국회당에 가서도 혁신을 할 수 있어요. 국행당이냐 민주당이냐 이거 다 따질 것 없이 어느 조직에 가서라도 그 조직을 혁신하는데 이래경만큼 적임자가 없다. 그 점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우리 언론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그것을 잠시 생각해 보려고 그래요. 한겨레 신문이 이래경 부실 검사 부실 검증 참사 민주당 의원들 검색만 했어도...

이래경 민주당 혁신위원장 취임에 따른 강력한 반대자들(홍영표, 이상민, 김종민, 송갑석 등)

민주당의 혁신위원장으로 임명된 이래경 선생님은 김근태,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을 지원하며 지금까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당이 발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래경 선생님이 사의를 표명하면서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인터뷰를 했으며, 최근에는 이래경 선생님이 자신을 악마화해서 마녀 사냥하듯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 문제라는 얘기를 했다.
근데 내가 어떻게 이재명이랑 이래경이 유능한 인물인지 알았을까 궁금해. 이재명이 민주화나 노동 운동을 한 사람은 아니잖아. 그럼 알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나중에 알고 보니까 민주화 운동의 원로들이 추천한 거였어. 이부영 선생님 예를 들면, 그리고 함세웅 신부님, 이부영 선생님, 임원영 선생님. 문화평연구를 하면서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대가들이 이재명을 추천한 거야. 이나윤 선생님도 그분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이걸 맡았어.
언론에서는 한겨레 신문이 이런 말을 썼어. 이런 소리는 말이 안 되는 거야. 왜 말이 안 되는지 곧 설명할게.
이상민이야. “이재명이 무한히 책임질 방도는 대표직 사퇴, 사퇴가 혁신의 첫걸음이야”. 이상민이 이런 말을 하면 조중동이나 국힘당의 반응은 이해할 수 있지. 그런데 같은 민주당 내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송갑석도 마찬가지야.
이래경과 함세웅 신부를 비롯한 민주화 운동의 원로들이 추천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혁신위원장 선임 전날에는 장고 끝에 악수도 했었고 송갑석도 그랬다고. 그래서 문제가 되는 거야. 이 사람은 정말로 내가 논평할 가치도 없는데 신문에 나와서 자기가 앞장서서 이혜영에 대한 극렬한 반대를 하고 있어. 이런 상황에서 정말 답답하다고 생각해.
비명계 이상민은 이래경의 혁신이 이대명의 위기를 더욱 증폭시킬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 이재경의 혁신이 이래경을 사당화시키냐 이재명을 사당화시키냐 하는 반발과 천안함 자폭 발언도 논란이 되고 있어. 홍영표, 이상민, 김종민과 같은 사람들이 반대를 선언했어. 이 사람들은 전형적인 수박이야. 반대한다는 건 인선을 잘 한 거야. 조중종이 반대하잖아. 그걸로 잘한 거야. 왜 잘한 선택인지 설명할게. 지금 우리 시대에 인간이 원하는 것은...

돈, 권력, 명예라는 자원/수단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그의 인격을 드러낸다

우리 시대든 옛 시대든, 돈과 권력, 그리고 명예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수단, 자원입니다. 명예는 없어도 돈만 있으면 되는 사람도 있고, 돈보다 권력을 더 중시하는 사람도 있으며, 돈과 권력보다 명예를 더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누구나 돈, 권력, 명예를 자원으로 소유하길 원합니다. 이들은 우리 삶의 자원이자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원을 획득한 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그 사람의 인격을 형성합니다. 돈과 권력, 명예를 가진 채 살다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죽는 사람도 있고, 이 자원을 영원히 빛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이 자원을 추구하다 죽어서 자식들에게 물려주면 자식들은 시궁창에 빠지게 됩니다. 정순신, 이동관 등 이런 사례들이 있습니다. 돈과 권력, 명예를 자식들을 위해 사용했지만 어떻게 끝나게 되었을까요? 나는 그 후손들이 모두 망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적이지 않아요. 같이 공부하는 아이들을 제대로 돌봐주지 못하고 돈과 권력, 명예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어요. 300번 머리를 찍었다며 자식들은 부모의 거울입니다. 그래서 생물학자들이 유전자라는 말을 붙인 것은 정말로 잘한 일이에요. 그것은 유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재평가의 프레임워크

돈, 권력, 명예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인재 평가의 프레임워크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왔습니다. 사람이 한 말, 행동, 의사결정이 그 사람의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을 통해 사회적 성취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개념은 막스 베버가 정치인들에게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에서 기원했으며, 기업과 사회 전반에 적용 가능한 역량 진단 모델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100년 전에 언급되었으며, 이후 약 70~100년 동안 학자들이 연구하고 역량 모델과 관련된 이론과 실무적인 방법론을 개발했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인 '어세스먼트' 또는 '컴피턴시 어세스먼트'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방법론은 사회적 성취를 이룩한 사람들이 어떤 역량 요소를 얼마나 발휘했는지를 알아내는 데 도움을 주며, 이를 통해 해당 역량을 발견하는 방법을 제공합니다. 이를 통해 사람이 비슷한 환경에서 높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예측 가능성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동은 반복 가능하고 재현성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명박이 현대건설에서 한 행동을 대통령이 된 후에도 동일하게 반복한 것처럼, 인간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행동을 관찰하여 미래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홍영표가 현재 하는 행동은 미래에도 동일하게 반복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량을 진단할 때 중요한 점은 사건이나 현상이 발생한 맥락과 그것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는 해석학적 프레임워크에 속합니다. 사건이나 현상이 발생한 맥락을 파악함으로써 올바른 해석과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해석학적 순환'의 개념에 해당합니다. 맥락 없이 사실만으로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건을 이해하려면 맥락을 고려해야 합니다.
돈, 권력, 명예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살펴보면 맥락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나의 세계관과 부합할 때 올바른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역사의식과 시대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래경, 그는 누구인가?(약력)

그래서 이 배경을 한 번 보자 이 말이에요. 이제 이혜경 그는 누구인가요? 아주 간단한 양력을 먼저 소개하고, 뒤에 10년 전에 프레시안과 인터뷰한 내용이 있어요. 그 인터뷰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인터뷰를 했어요. 그 사건이 진짜 사실인지 확인해보도록 하죠.
그분은 1954년생이에요. 1973년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로 입학했어요. 그런데 1975년에 김상진이라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축산학과 학생이 유신 철폐를 주장하는 편지를 쓰고 자살했어요. 그 이벤트는 서울대학교 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로 인해 유신 반대 운동이 일어났어요. 그때 이래경은 서울대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제적당한 후에는 징집되어 군대에서 강원도 원통 지역에 32개월 동안 말단 보병으로 복무하며 힘들게 지냈어요. 상황은 감방에 갇혀 있는 것보다 더 안 좋았다고 해요. 이 사건들은 녹화 사업 전조전이었어요.
그리고 1979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맞고 사망했어요. 이 이야기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아직 잘 모를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박정희가 사망한 후에 복학 운동이 일어났어요. 그때 서울대뿐만 아니라 전국의 다른 대학에 다수의 학생들이 복학했는데, 이를 중심으로 복학생 대책협의회가 만들어져 대학 내의 조직화와 학생들의 항의 운동이 다시 시작되었어요.
그 때 법학대학에는 이범열, 사회대학에는 이해찬, 인문대학에는 이철, 공과대학에는 이래경, 의과대학에는 서광태, 사범대학에는 고은수가 대표로 활동했어요. 이 활동은 주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과 성균관대학교와의 연락을 통해 전국적으로 조직화되었어요. 그런데 그때 광주 사태가 발생했어요. 그때는 광주 사태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5.18 광주항쟁이라고 부르는 거죠. 광주의 시민들이 폭력을 일으켜서 전두환 정권이 진압하기 위해 강력히 나섰습니다. 그때 일부 소식에 따르면 광주 항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사태에 대한 대응을 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뭡니까? 이 때 뭘 했냐 하면, 입시 학원을 했어요. 이혜경이 입시 학원을 해서 잘했어요. 그래서 이 비즈니스를 해도 잘할 사람이에요. 입시 학원에 최고급 윤전기를 갖다 놓고 복사하는 일을 했었는데, 수천 장의 소식지를 프린트해서 각 대학, 각 단과 대학에 뿌렸어요. 그 결과로 국기 문란죄로 100여 명이 지명수배를 당했고, 다시 나왔어요. 그래서 다시 제작을 했고, 복학을 했다가 다시 제작을 했어요. 그래서 이제 먹고살기 위해 다양한 일을 하면서 회사에 이야기를 전달하고 일을 해요. 그래서 1982년에 무역회사에 입사했어요. 나중에 설명할게요.
녹화 사업 중 하나로 프렉티스(Praxis)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어요. 그리고 1983년에 민주화 운동 청년연합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그때 김근태를 만났어요. 그래서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김근태를 도와주기로 했어요. 자기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장사를 해서 먹고 살아야 되고 김근태를 도와야 되기 때문에 오파상을 개혁하려고 결심했어요. 이 일이 1984년에 일어났어요. 그 후, 자신이 무역회사에서 일하는 것을 그만두고 독일 호이트 그룹 제품을 한국에 판매하는 판매상으로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래서 독일 호이트 그룹은 80%를 가지고 있고, 이혜경이 20%를 가지고 있는 가족 기업인 한국 호이트를 설립했어요. 그 결과로 많은 돈을 벌게 되었어요.
김근태가 재선될 때 한반도 재단을 설립하고, 자신이 운영위원장을 맡았어요. 그 이후 한반도 재단은 김근태 재단으로 바뀌었고, 2006년에는 과학기술 실천연합을 만들었어요. 이렇게 사업을 하면서 서울대 명예 졸업장도 받게 되었어요.
그리고 2007년에 (사)일촌 공동체를 설립했어요.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단법인을 만들었죠. 사단법인은 개인 자금을 투자하여 설립했습니다. 또한 복지국가 소스이어티도 설립했어요. 그리고 2015년에 27년간 일했던 호이트 한국에서 은퇴하게 되었어요. 그때 나이도 이미 60이 넘었었습니다.
그래서 비즈니스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로 했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매출은 약 1천억 원 정도 되는 시기였죠. 처음에는 작은 오파상으로 시작한 비즈니스가 엄청나게 커져서 23명까지 컸다고 해요. 하지만 현재는 인원이 많이 줄었어요. 지금은 독일 사람이 맡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다트(DART)에 들어가서 확인해봤는데, 다트는 금융감독원에서 운영하는 전자공시 사이트로 어떤 회사든 그 정보를 확인할 수 있어요. 다트에 들어가보니 현재 한국의 연간 매출은 약 200억 원 정도 되는 것 같아요. 2022년에는 매출이 많이 줄었죠.
이래경은 얼마나 비즈니스 마인드가 뛰어난 사람인지 알 수 있어요. 오파상에서 독일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면서 '우리와 함께 합작 회사를 만들자'라고 했어요. 독일은 가족 기업이 많기 때문에 그런 제안이 나왔는데, 이 합작은 세계적으로 큰 기업인데도 불구하고 매출이 6조~7조 원에 달하는 가족 기업이에요. 그런데 전 세계 어디에서도 직원들에게 지분을 주는 경우는 없는데, 그 기업은 한국 지분의 20%를 주었어요. 그래서 퇴직할 때 약 40억 원 가까이 받았다고 해요. 그 후에 다른 백년을 위해 또 다른 사업을 성공시켰어요. 그렇게 해서 이래경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래경이 쓴 책: 《다른 백년을 꿈꾸자》, 《시민주권 시대의 정치경제론》

사실, 다른 백년에서 출판한 책을 먼저 접하게 되었는데, 이번 인터뷰에서 소개하신 책을 먼저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은 최근 인터뷰 중에 가져오셨던 책입니다. 그 전에 제가 접한 책과는 다른 내용의 책이었어요.
이 책은 제가 먼저 접하게 된 이유는 2020년에 출간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보고 공부하며 일해본 경험이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직접 체험해보고 와서 우리나라를 민주주의 국가라고 이야기할 때, 제 경험을 바탕으로 그렇게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민주주의라고 말하더라도, 제 세포가 알아차린 바로는 이미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닙니다. 제 경험으로 봤을 때,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보고 그 속에서 숨을 쉬어본 사람으로서,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투표를 하고 독일에서도 투표를 합니다. 투표를 통해 대리인들을 뽑아 일을 시키지만, 우리는 민주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며 정당들도 서로 다투고 있으며, 이는 확실하게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은퇴한 뒤에야 정치의 현실을 살펴보면서 왜 우리가 제대로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하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2014년에 개시한 연구는 현재로서 9년째 경과하였음을 감안하면, 2024년에는 제가 이룬 9년간의 노고와 연구를 의미합니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에 대한 서적들을 폭넓게 습득한 사실은, 정치학자들과 시민단체에서 발간된 서적을 포함하여 저의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심으로 인해, 박원순과도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민주주의의 미흡한 점에 대해 더욱 깊이 탐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혜경 선생님이 저에게 제공한 책인 『시민주권 시대의 정치 경제론』에 매료되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 책은 이혜경 선생님이 집필하신 것으로, 저는 이를 가장 먼저 읽게 되었으며, 그 내용에 크게 놀랐습니다.
이래경 선생님은 정말로 놀라운 분이시며, 이에 대해 더욱 상세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저에게 제공된 『다른 백년』이라는 제목의 책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이혜경 선생님이 왜 '다른 100년'이라는 제목으로 조직을 창설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현재까지 지나온 100년과 유사한 시기를 다시 경험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의 서문은 다소 분량이 길지만, 한 페이지 정도의 분량을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독일 파트너 덕분에 아까 얘기했던 호이트 그룹 호이트 그룹과의 파트너 덕분에 기업가로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지내온 세월이기도 했지만 민청년 초대의장 출신 김근태 선배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정치권 외곽에서 지원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김근태라는 걸출한 정치인 선배를 통해 대리 만족의 역할이었지만 단순한 기업 활동을 넘어서 정치 영역을 간접 경험하는 매우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고 김근태 님은 제가 존경하는 민주운동권 선배이자 자칫 개인적 편안함을 추구하는 강남족의 함정에 빠졌을지 모를 저를 새로운 영역으로 이끌어준 은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은퇴하고 김근태 한반도재단 운영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정책연구회를 만들어 여러 분야의 교수님 그리고 전문가들의 소중한 제안과 구상을 배울 수 있었고 2007년에는 지역 시민사회 중심의 보살핌 운동 그러니까 돌봄 운동을 지향하는 일촌 공동체를 설립하여 지역 활동가들과 함께 즐거운 체험을 가졌습니다. 같은 해 출범한 복지 국가 소사이어티에 8년간 참여하면서 한국 사회의 주요 아젠다인 복지를 배우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학생운동 출신의 사업가들을 중심으로 기업 문화와 윤리 경영을 추구하는 민주 기업가 회의하는 실험적 활동 기구를 2년간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중년기업연합회에 특별회원으로 참여하여 공정거래에 관한 활동도 공유해 보았습니다. 그런 고통과 좌절이 순간이었지만 이순의 나이를 넘기고 보니 넘기고 보니 모든 것이 남다른 많은 체험을 겪어보는 계기였고 축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글은 지난 40년간 느끼고 공부하고 고민해 온 주제들을 나열한 것입니다. 마치 선로 공이 망치로 때려서 울려 나온 소리로 선로의 이상 여부를 판단하듯 전문적이고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자기가 전문적이고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과 해법을 하나의 책으로 묶어 제안해 봅니다. 이 1부 2부 한국 사회의 새로운 전환을 위해서….
이게 왜 선로공 얘기가 나오냐면 Voit가 이런 철도, 철도 제작 그다음에 열차 이런 동력 장치를 제공하는 금속회사예요. 금속회사 금속에 관한 것으로 만들었어요. 수력 발전하는 동력 장치 그다음에 이런 철도 열차 이런 거의 동력 장치 그다음에 자동 장치 이런 거를 공급하는 회사거든요.
이 공급을 어떻게 잘했는지 내가 인터뷰할 때 들었어요. 공급할 때 공급업자가 항상 을이잖아. 근데 이래경의 경우는 공급업자가 갑이었어. 워낙 그 원리를 잘 설명해서 철도청이나 또는 포스코나 또는 수력 발전하는 이런 회사들이 자기를 갑으로 대했다고 오히려 왜냐하면 이렇게 서비스가 좋은 잘 해주는 납품업자가 없거든. 그러니까 매출이 늘어날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마치 선로 공이 망치를 때려서 울려 나오는 소리로 철로의 이상 여부를 판단하듯이 전문적이고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자기가 전문적이고 체계적이지는 않다는 이런 거야. 학문적 훈련을 받은 적이 없으니까 자기가 혼자 공부했으니까.
이제는 전환해야 될 때가 됐다는 거지. 한국 사회의 대변혁은 가능하다 이거지. 복지의 역사에서 만나는 사상과 이 사상가든 철학자들이 동서양 철학에도 조예가 깊어요. 이 책을 보면 그걸 알 수 있어요. 왜? 다른 100년을 꿈꾸자. 이제 지나온 100년은 너무 처참했고 이제 다른백년을 꿈꾸면서 다른백년이라는 조직을 세운 거죠. 이게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음 시민주권 이거를 한번 봅시다. 나는 이 책을 먼저 봤어요.
이 책 시민주권 시대의 정치경제론 여러분도 한번 보시길 원해요. 이것도 다른 10년에서 출판이 된 건데 그래서 내가 옛날에 칼럼을 썼던 거기서 책을 냈구나. 그래서 이거 요새 뭐 그게 유행하죠 내 돈 내 산 내 돈 내 산 책을 살 때는 난 내 돈 내 산으로 사죠. 항상. 그래서 여기도 한번 간단히 읽어봅시다. 여기 제가 그래서 아주 문장이 쉬우면서도 무게가 있어요.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지난 120여 년의 세월 속에 기미년 만세 삼창은 구한말 이후 민족 역량을 모아내어 항일 해방 투쟁 역량의 저수지를 이루었다. 1980년 광주항쟁은 해방 이후 30여 년간 지속된 냉전 구조와 군사적 억압 체제를 온몸으로 거부하며 민주화 운동의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했다. (광주가 새로운 민주화 운동의 근거지가 됐다 말이야.)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27년 촛불혁명은 기득권에 포획되어 박제화된 현행의 형식적 민주주의와 절차의 한계를 뛰어넘어 시민주권과 시민 권력에 기초한 새로운 정치와 경제의 시대를 요구하였다.
맞는 얘기잖아. 촛불혁명은 새로운 정치 새로운 경제의 시대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러나 계속 읽어드립니다.
그러나 촛불혁명을 앞세운 문재인 정부는 미래에 대한 전망과 철학적 지향도 없이 시대의 역풍에 떠밀렸다. 부진한 일자리 창출 능력을 비롯해 신생아 출산율 저하와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양극화의 지표 등 주요 사회 경제적 수치는 사회 한국 사회가 시스템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뒤집어 얘기하면 혁명적인 개혁 조치가 없으면 미래적 희망이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명확한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명확한 역사의식과 시대 정신이 없으면 자기 재산을 희생하지 않고 사회에 기여하려는 생각을 갖기 어렵습니다. 이 점을 여러분께서 알아야 합니다.
이 글은 한 편씩 작성된 글들로, 다른 백년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이 책은 2020년에 출간되었으며, 문재인 정부 시기에 발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2019년부터 문재인 정부가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후퇴할 것이며, 나라가 악화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시기는 2019년, 조국과 추미애의 사태가 발생한 때였습니다. 그때부터 서서히 이 생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내 경험상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부터 개혁은 어려워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래경의 인터뷰(프레시안, 2013.11.17.)

아, 그래서 이제 저는 인터뷰를 신청하고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급하게 구글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프레시안에서 김근태가 아폴로적 인간이라면 노무현은 디오니소스적 인간이라는 주제를 다룬 2013년 11월 17일에 실린 인터뷰 기사가 있었습니다. 이 기사는 아주 길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비즈니스를 진행하는 시기였습니다. 비즈니스가 잘 되는 시기였죠. 몇백억씩 벌다가 천 원까지 올렸으니까요. 그리고 2년 후에 은퇴했습니다. 그래서 이때도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사업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래경 선생님이 이런 사람이셨구나. 그 전에는 저는 몰랐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제가 몰랐습니다.
그 인터뷰 내용은 이렇습니다.
"쿠오바디스 도미네"라는 질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준비하여 답변할 준비를 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하며 복지 소스아이티와 복지국가 소사이어티의 이내경 공동대표인 호이트 한국 대표를 만났습니다. 그는 항상 준비된 것처럼 담담하게 자신감 있게 대답했습니다. 시대와 상황이 요구할 때, 거부할 수 없는 마음으로 답변하였습니다. 그렇게 피하려고 노력하면서 마치 가시가 목에 걸린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존재하며 그에 제약을 받고 규정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점은 제게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시대 정신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가장 보람 있는 것입니다. 시대 정신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우리 사회가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2013년에 복지국가 소사이어티의 이내경 공동대표로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오늘의 시대 정신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삶은 어떤 모습을 갖고 있을까요? 예전에는 가난하고 배고픈 시기에 종교 없이는 어려운 생활이었습니다.
이래경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예수를 알리기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한 열혈 소년이었습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허투루 하지 않고 열정을 가지고 접근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열정적인 전도자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신과 독재에 대해 잘 알지 못했으며, 대학에 진학한 후에야 독재 정권과 인권 탄압, 민주주의 억압과 같은 현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4.19 혁명 시기에도 움직이지 않았던 서울 공대의 시위 선봉에 서게 되었습니다. 4.19 때 서울 공대는 시위를 하지 않았던데, 그런데 이혜경이 서울 공대에 가서 상황을 바꿨습니다.
청년 시절에 두 번의 제적을 받았던 이래경은 한국의 산업 발전을 동반한 오퍼상 사업을 시작으로 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독일에서도 인정받은 CEO로서 연간 매출이 10조 원에 이르는 회사를 운영했습니다. 최근에는 매출이 줄어들어 약 6-7조 원 수준입니다. 그는 독일 기업인 호이트 그룹에서 창업주 가족을 제외한 4명만이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약 2-3만 명의 종업원이 있었습니다. 이래경은 종업원 중 유일하게 지분을 가진 사람으로서 가족이 지분을 가진 것과 달리 외부인으로서 지분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성공한 이래경은 어떻게 김근태와 함께 한국의 정치 발전을 위해 노력했을까요? 어떻게 자신의 수입의 1/3을 국가에, 1/3을 사회에 기부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진보적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복지 국가를 실현할 수 있었을까요?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하는데, 어떻게 인생을 1/3로 나눠 살았을까요? 마지막으로 언급되었지만, 이것이 바로 1/3 할 원칙입니다.
이래경은 자신의 수입의 1/3을 국가에 기부하고, 1/3을 가족에게 환원하며, 나머지 1/3을 사회에 환원하는 생각을 가지고 오랫동안 실천해왔습니다. 이는 상당한 금액이었습니다. 그가 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세금과 국가에 환원하는 것 외에도, 가족은 아파트 한 채를 소유하고 있으며, 이것이 그의 재산이었습니다. 이는 보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이트라는 회사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반적인 소비재를 생산하는 회사가 아니었습니다. 보이트는 수력 발전과 관련된 모든 기계, 장비, 설비를 제조하는 회사였습니다. 또한 페이퍼(종이)와 관련된 제품도 오랫동안 수입하지 않고 한국에서 생산했습니다. 그 외에도 터보 동력 장치, 철로 관련 장치 등을 납품하는 영업 조직이었습니다. 이렇게 영업을 잘 한 결과로 이래경은 성공했습니다.
저는 진보적 자유주의를 외치는 가슴 따뜻한 부자들이 더 많아지길 바랍니다. 글에서는 호이트라는 기업을 언급하며, 그 기업 덕분에 이 사업이 성공한 것을 언급합니다. 호이트는 철도 차량 부품 분야에서 성과를 거두어 철도 차량 설계의 선도적 역할을 했고, 이 성과가 1988년 독일 본사에서 현지 법인을 만들자는 제안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으며, 한국 철도 차량 분야와 독일 호이트 그룹에서 큰 신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창업주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지분을 나눠주기로 했습니다. 이후 저는 서울 공대 금속공학과에 진학했으며, 기독교로 인해 종교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대학에서는 인문학 강의를 듣고 데카르트의 방법서설과 H.Ca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내 종교관이 흔들렸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많은 사람들이 겪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근본주의적인 한국 기독교에서 자라나다가 독일에서 다른 시각을 얻게 되었을 때 내가 속았다고 느꼈습니다.
이후에는 조세희 선생님, 황석영 선생님의 작품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습니다. 그리고 유신 독재 정권에 항의하기 위해 학생들이 죽을 정도로 시위를 했는데, 김상진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쓰고 자살하는 사건은 이래경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야간에 그 때 다니던 교회 건물에 가서 "인간 해방 서문문"이라는 제목을 달고 유인물 3천 장을 만들어 새벽 5시에 등교 준비를 하는 동안 공학 강의실과 화장실에 흩뿌렸습니다. 그렇게 하자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서울 공대생이 산업 분야의 주역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침묵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해서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썼지만 그 날 이후로 공대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공대생들의 특징은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거의 모든 대학이 반정부 시위에 참가했지만 서울대 공대만 정상적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4.19 혁명 시절에도 공부만 계속했던 것이 서울대 공대의 전통이었습니다.
하지만 공대에도 이제 이래경과 같은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최근에는 서울공대 출신이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스타트업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유튜브를 듣고 충격을 받아서 나를 만나자고 아버지가 몇 번이나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만나봤는데 그 사람은 여러 가지로 자극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나이가 50을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년처럼 납땜을 하고 연구를 하고 있다고 말하더라고요. 정말로 공대 출신으로부터 잘 배우고 있습니다.
어떻게 조용하던 청년이 앞에 나와서 시위를 할 때 마이크를 잡고 시위를 주도할 생각을 했느냐는 질문에는, 젊은 사람이면 누구나 성격적으로 격분할 때가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도 그 때 한 순간 격분한 적이 있던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의해 보수적인 사람이었지만, 예수 신앙의 핵심은 나라와 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적인 신앙의 핵심입니다. 몸과 정의를 위해 올바른 일을 위해 나서야 하는 거죠. 그래서 김상진 열사 앞에서 집회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자신이 나서서 김상진 열사를 위해 묵념하고 짧은 웅병과 만세 삼창을 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후로 다른 사람들도 차례로 나와서 사자후를 터뜨렸고, 비록 그것 때문에 경찰에 붙잡혀 가고 제명을 당했지만, 아직까지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제적 당한 후에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노동운동 출신이 겪은 감옥생활은 당시 내가 겪은 군대 생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감옥 생활이 더 낫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대에서 김삼수라는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현재 산업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입니다. 그 친구로부터 박현채의 "민족 경제론", 조영범의 "후진국 경제론", 리영희의 "우상과 이성" 등의 책을 추천받아서 읽었고, 이런 책들을 읽기 시작한 것이 독서 토론을 통해 본격적으로 사회 운동과 사회의식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이유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일생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서전이 없으니까 평전도 없고요. 그래서 프레시안이 그런 점을 이렇게 다루어주어서 정말로 좋았습니다.
그래서 노동운동도 잠시 동안 참여했었지만, 이 이야기는 노동운동을 가서 일부 참여하던 도중에 항상 자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노동을 잘 못해서 그런 거라고 말했지만, 아니었습니다. 다 가서 취직하려고 했는데 노동을 그렇게 하면 사회의식이 있으니까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당연히 자르게 되고요. 그래서 어디 취직하려고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손을 검사해. 아니, 그냥 매끈한 손이면 "얘는 시킬 일이 없는 거지"라고 말하더군요. 결국 내가 노동운동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래서 노동운동은 포기했습니다. 그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운동이나 그런 것도 포기합니다. 그리고 80년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복학하게 되었습니다.
복학하게 되어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10월 26일 사건이 발생하여 졸업 예정자들이 생 공대에서 제적되고 복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새로운 인생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서울대 복학생 협의회는 다양한 역량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법대 대표로는 이해찬, 인문대는 이철, 공대는 이래경, 의대는 서광태, 사범대는 고은수 등이 있었습니다. 서울대의 움직임은 복학생 협의회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며 군발이 전두환을 중심으로 전면에 등장할 것으로 예상되어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생겼나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인이 운영하던 입시 학원에서 시간당 3천 매에서 5천 매까지 팔리는 최고의 윤전기를 보유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밤에 와서 윤전기를 사용하겠다고 하더니 그냥 총학생회에 기증하였습니다. 5.18 광주 운동 전날에 학생들이 총 집결하고 그 학원에서 광주의 진심을 알리는 유인물이 제작되었고, 서울에서는 5월 23일에 처음으로 구로공단에 퍼뜨려졌습니다. 유인물을 나눠주던 후배들은 한강 현장에서 다 잡혀가고 경찰은 본인을 이해찬 선배와의 연결고리로 만들어 수배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광주에 가서 6월 13일에 유인물을 나눠주던 사람들도 다 잡혀가고 이해찬과 본인도 수배자가 되었습니다. 6월 13일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본인을 포함한 100여 명에게 공개 수배령이 내려졌습니다. 집에서는 어머니가 위독한 암으로 인해 자수를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고민 끝에 형님을 만나고 나와서 그 자리에서 형사에게 잡혀 자수한 셈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이모부 덕분에 조사를 받고 기소 중지로 나오게 되었으나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려운 가정 사정으로 다시 취업해야 했습니다. 이모부는 고위 간부였는데, 그 이모부 덕분에 감방에 가지 않고 유치장에서만 한 달씩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방 생활은 해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제 더 탐사에서 그런 경험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여 무역회사에 취업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문교부라는 이름으로 몇 차례 전화가 왔는데, 무역회사는 도진실업이라는 회사였습니다. 영동개발이라는 건설회사의 자회사인데, 그 도진실업에서는 엘리트 사원으로 잘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진실업은 이봉래 사건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국은행에 있을 때 도진실업의 이봉래가 한국은행 직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봉래 사건으로 인해 한국은행 직원들은 집에 가지 못하고 통행금지가 있었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토를 못하고 자다가 신신 사우나에 가서 잠을 잔 것입니다. 그때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금융 시스템이 붕괴되었고, 본인은 그 사건과 연관된 도진실업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회사는 이봉래 사건 이전부터 있던 건설회사인 영동개발의 자회사였습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본인의 인생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문교부의 직원들이 이래경에게 뉴서울 호텔 커피숍으로 불러와서 해외에서 공부하고 싶냐고 제안했습니다. 그들은 돈을 지원하고 한국에 돌아온 뒤 대학 교수 자리도 보장해 준다고 약속했지만, 대신 교포 사회에서 발생하는 일을 보고해야 한다는 조건을 냈습니다. 이런 제안은 나를 낮추려는 음모였고, 거부하면 평생 비밀로 지키라는 협박까지 받았습니다.
이 제안은 기무사, 보안사, 중앙정보부와 관련된 첩보 기관의 활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반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고,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이 시대는 암흑의 시기였고, 그 당시 첩보기와 끄나풀로 공부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나는 사업에 집중하여 사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85년에 김근태와 만났고, 그 이후 그는 고문 사건으로 고통을 겪다가 일찍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일선이나 2선에서는 활동하지 않았고, 민청년 부설 연구소에서 정세 연구를 발간하는 일을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한 달에 50만 원씩 지원했습니다. 이 돈은 상당한 금액이었고, 10년간 총 5천만 원에 달했습니다.
이는 당시 은마아마트 두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부동산 가격 상승 등으로 인해 돈이 큰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래경은 김근태에게 오피스텔을 제공하여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으며, 그가 정치에 입문하려는데 도움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치에 뛰어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애써야 한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래경과 김근태가 만난 곳은 우이동 산골 속에 있는 명성의 집이라는 천주교 피정 장소였습니다. 본인 성격에는 교수나 신부가 더 잘 어울린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나마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치, 정치에 입문하겠으니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가 이 이야기를 일부러 명상의 집 예수님 상 밑에서 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에게 하는 자신의 약속처럼 느꼈습니다. 그렇게 그를 돕게 되었습니다.
1994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에도 계속 도와달라고 하니 그 사람이 살아온 과정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내가 후원의 책임을 맡게 되었고, 그래서 후원 회장이 된 거죠. 후원의 실무자가 지금 민주당 유은혜 의원이었고, 내가 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으면서 한반도 재단을 만드는 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김근태와 이래경, 이 두 사람은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거죠.
그래서 인터뷰하면서 아니 윤혜, 내가 김근태가 아니라 그가 당신 밑에서 실무자 역할을 했던 유은혜가 지금 교육부 장관이었던 그 유은혜 맞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맞다는 거예요. 아니 그런 모순을 데리고 일하냐고 내가 그랬더니 그가 웃었습니다. 무엇도 할 줄 모르는 내가 그래서 왜 유은혜가 아무것도 안 하고 저러고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건 나중에 얘기할게요. 한반도 재단을 만들었잖아요. 그래서 이 한반도 재단이 뭐가 뭘 만들었다는 거잖아요. 그건 다 자기가 돈을 내는 거예요.
일촌 공동체라는 새로운 사회 운동을 시작했는데, 2007년에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일촌 공동체라는 새로운 사회 운동을 시작한 계기는 노무현 정부가 출범할 때 매우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2003년 7월, 인천 부평구 청천동에서 30대 엄마가 아이 셋을 데리고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을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철저한 고발이었습니다. 노무현 정부가 이 사건을 심각하게 다루어야 했는데, 그 상황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대신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습니다. 분양 원가를 공개하는 게 말이 되느냐, 장사꾼 논리대로 해야 한다는 참으로 한심한 발언을 했습니다. 이 사건은 처음 듣는 것이었고 아마 큰 사건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때 한국은행을 나와서 전국을 다니면서 이 컨설팅 일로 인해 그런지, 그때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노무현은 한심한 발언을 했고, 김근태가 보건복지부 장관을 하던 시절인 2004년 12월에는 대구에서 5살 난 남자아이가 벽장 속에서 굶어죽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때 내가 김근태 장관을 대신해 부인인 인재근과 함께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당시 현장의 사회국장이 사건 브리핑을 하는데, 공무원이 이번 일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인력과 행정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건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브리핑 도중에 이래경이 소리쳤습니다. "때려치워라, 사람이 죽었는데 무슨 변명만 하고 있느냐!" 욱하는 성격이 있는 거죠. 그래서 일촌 공동체가 나왔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제는 우리가 정부만 믿어서는 안 되고 시민사회가 함께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몰입된 지금 우리 사회는 잘못 가고 있다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성장과 출세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상생하는 사회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던 저는, 시민 스스로 상생하는 문화와 인간과 생명을 중히 여기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자는 결심으로 일촌 공동체를 기획하고 2007년 3월에 법인으로 설립했습니다. 이것도 제 자산을 활용하여 일촌 공동체라는 민간에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복지 법인을 만들었습니다. 정부가 못하니까 민간이 스스로라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일촌 공동체를 설립한 후에는 국가 복지와 국가 소수 IT와 같은 시민단체 및 시민사회 단체와 함께 계속 활동해왔으며, 이렇게 삶을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은 시대와 상황이 요구할 때마다 나의 마음에서부터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피하라고 하면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았습니다. 각 시대의 흐름에는 그때마다의 시대 정신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제 치하 시대에는 독립이 가장 중요한 시대 정신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국민의 역할과 국민의 생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경제 발전이 시대 정신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주요 공신은 박정희라고 생각하십니다. 물론 그가 역할을 한 부분도 있지만, 실제로 최고의 공로는 조봉암에게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조봉암은 농지 개혁을 실현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조봉암이 농지 개혁을 계획하고 실현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경제 발전은 없었을 것입니다. 박정희는 장면 정부 시절에 이미 마련된 경제 발전 초안을 기반으로 자신이 쿠데타로 집권한 후 이를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박정희를 평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자립 경제의 핵심으로 중공업과 산업재 중심의 경제 발전을 추진하고 이룩한 점입니다. 이는 제3세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업적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이후에는 생활 문제가 해결되면서 사람들의 요구는 민주화로 변화하였습니다.
유엔에서는 제1 아젠다가 인권이고, 제2 아젠다가 참정권입니다. 참정권은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민주국가는 국민들이 국가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고 그 결정에 영향을 미칠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지난 대선, 특히 2012년 대선에서 국가정보원, 안기부, 기무사 등 권력 기관의 개입은 민주적 기반 원칙을 위협하는 중요한 도전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참정권 이후에는 시대 정신이 사회 경제적인 권리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오늘날의 시대 정신입니다. 복지 국가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도전과제이자 거부할 수 없는 시대 정신입니다.
저는 인도의 경제학자인 아마티아 센을 좋아합니다. 그는 복지 국가를 지향해야 할 철학을 "인간에 대한 안전 보장"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서 개개인이 내재한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개념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와 같은 논쟁을 보면서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복지는 기본적으로 보편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자연의 위대한 산물이자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따라서 우리 모두에게 가치와 존엄은 예외 없이 보편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적인 조건 안에서 어떻게 가장 적합하고 효과적으로 보편적 복지를 실현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70년대에 20대였던 이혜경은 정부 민주화를 요구했다면, 2013년에 60대인 이래경은 국가를 대상으로 복지 국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난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청년 시절에 이래경은 누구인지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막연한 분노로 운동을 했습니다. 독립된 체계나 사상을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청년 정신입니다.
나이가 이순이에 이은 지금, 우리와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을 가야 할지 깊이 느끼고 그 방향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업 운영과 동시에 공동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일에도 시간과 자금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서 "어떻게 나의 몫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는 인간이 도덕적인 존재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도덕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있습니다. 도덕을 무시하고 살면 되는 입장도 있고, 도덕은 우리 사회와 국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법칙이라고 말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이래경은 도덕적 의지가 도덕적 법칙의 핵심이라고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도덕은 우리 내면에 빛나는 도덕적 원리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 스스로 원하는 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을 가진 위대한 재창조 작업이며, 동서양 철학에서도 깊이 연구되고 있습니다.
이래경은 자신의 수입 중 1/3는 세금으로, 1/3은 개인과 가족을 위해 사용하며 나머지는 타인을 위해 지원하는데 사용합니다. 7년 동안 1억 원을 넘는 금액을 후원한 것도 있습니다. 가끔은 개인과 가족을 위해 사치를 즐기고 싶은 생각도 드는데, 이는 잠시의 생각이며 금방 내려놓습니다.
본인의 기본 봉급은 생활비로 사용하고, 경영 수당과 배당 이익은 대부분 사회 활동을 하는 지인이나 단체를 후원하는 데 사용합니다. 솔직히 가끔은 막걸리집에 가서 저렴한 가격에 저녁을 함께 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는 말을 했습니다.

무엇이 이래경으로 하여금 이렇게 살도록 만들었는가?

이래경은 1985년 제적당하고 오파상을 할 때까지 사회에 30억 원 이상을 기여했다고 합니다. 그는 세후 수입에서 중산층 가정 수준을 넘는 금액은 사회에 기여하는 것으로 삼고 실천해 왔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의 원칙은 3분할의 원칙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실제 수입을 총수입의 3으로 나누고, 하나는 국가에, 하나는 가족에게, 하나는 사회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살면 고급진 삶이 아니라 중산층에서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래경은 삶에 영향을 미친 인물과 사상으로 예수, 사서삼경, 존 롤즈, 조소양, 로베르토 웅어를 꼽았습니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사랑과 연민을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사서삼경은 그에게 윤리와 도덕의 기준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존 롤즈는 정의와 평등의 철학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조소양은 삼균주의를 통해 그에게 사회정의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로베르토 웅어는 비판적 철학을 통해 그에게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이래경은 민주당을 구원할 수 있는 유능하고 강직한 성품의 인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만큼이나 냉철한 사람, 조직론적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민주당을 시민주권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래경의 퇴진은 민주당에 큰 손실입니다. 그는 민주당을 구원할 수 있는 유능하고 강직한 성품의 인재였습니다. 그의 퇴진은 민주당에 큰 슬픔과 아쉬움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온 이래경의 혁신 정신을 극렬히 반대한 사람들

이래경은 혁신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를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국힘당은 자신들의 당이 좋고 남의 당이 어떻든 자신들의 일에만 신경 쓰는 경향이 있지만, 이들이 민주당에서 반대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특히 홍영표에 대한 비판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내년 총선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데, 당 대표와 사법 간의 다툼은 누구 때문에 생긴 것인가요? 그것은 검찰 때문입니다. 검찰이 삼백 몇십 번 압수수색을 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으며, 지금은 주변 인물을 구속해놓고 그들의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법 다툼을 일으킨 주범은 홍영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홍영표가 왜 검찰 개혁을 하지 않았는지 의문입니다. 180석을 가지고 이낙연이나 문재인이 사법 다툼을 일으킨 사람들이 누구인지 생각해보면, 검찰 개혁을 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송영길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나요? 그에 대한 수사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당 내에서 사기를 치다가 지금 민주당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코인 논란에 대해서는 저는 이 분야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코인 논란은 스위스나 독일에서는 이미 규정이 정해져 있어 법적으로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안정적인 환경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일을 제대로 해오지 않아서 코인 논란이 발생한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찾아보고 핵심적인 부분을 찾아 국민이 편안하게 이를 다룰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스위스나 독일처럼 법률적으로 확실하게 정해져 있는 샌드박스를 구축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정치인들은 그러한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문재인, 이낙연, 홍영표 등은 아무 일도 처리하지 않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김종민, 이상민, 송갑석 등이 무엇을 했는지 따라다니며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들이 원인 제공자입니다. 이런 나쁜 사람들이 문제로 인해 청년층에 반감을 일으킨 것입니다. 김철민 같은 인간은 제가 여기서 언급할 가치도 없습니다.

민주당뿐만 아니라 정치판 전체를 혁신할 사람: 이래경

내가 이 얘기를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어요.
그가 전파하여 가라데. 마가복음 1장 7절입니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매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가 누굽니까? 세례 요한이에요. 세례 요한이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매 신발 끈 신발 끈도 풀지 못할 것이다.
이게 무슨 얘기냐 그가 누구야? 이재명이야. 이재명이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래경이 뒤에 오나니 나는 이재명은 이재경의 신발 끈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야. 누가 오는 거야 지금? 민주당을 구원할 사람이 오고 있는데 너희들은 그거를 거부한 거야.
요한복음에서 또 얘기합니다.
요한복음 1장 26절 27절을 내가 요한이 여기서 세례 요한이에요 세례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에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세례 요한이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전에 준비를 하고, 나중에 진짜 민주당을 구원하고 전체 정치판을 구원할 구세주가 온다. 그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래경이다.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이래경만큼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인터뷰할 때 이렇게 민주당과 이 수박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큰일 날 일이다. 얘들 가만히 두면 안 되겠다. 내가 뭐라 그랬더니, 그 사람이 한 말의 맥락을 이해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고? 그러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어떤 맥락에서 그 말을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부패하고 어리석은 언론사들의 마녀사냥식 기사에 대한 반론

이 부패하고 어리석은 언론사 기자들의 마녀 사냥식 기사에 대한 반론을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열린 공간 TV와는 다른 형태로 시민언론 더탐사라는 방송이 어젯밤에 있었습니다.
그 방송에서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는데, 예를 들면 천안함 자폭이나 코로나 진원지 방향이 미국을 향한다는 등 맥락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그렇게 언급한 것이지만, 이것만 취해들어 음모론자나 반미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국제사법재판소가 푸틴을 전쟁 범죄자로 규정한 결정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푸틴이 전쟁 범죄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정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완전히 푸틴의 전쟁 범죄 여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산책을 하다가 서울대 이문영 교수의 강의를 듣는데, 이 교수는 러시아 전문가입니다. 그의 2시간 38분에 걸친 대담한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단순히 푸틴의 문제로만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맥락이 제공되며 설명이 이뤄집니다.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계속해서 참을 수 없게 되었지만, 전쟁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국제사법재판소가 푸틴을 전쟁 범죄자로 규정한 것은 미국의 말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제사법재판소의 결정에 대해 그냥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범죄자로 규정하려면 피의자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조건 없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언제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에 대해 들은 적도 없는데, 이에 대한 탐사 방송을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내경 선생님과 이문영 교수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를 모두 들어보고, 제가 이렇게 얘기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국제 정치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가 되었습니다. 왜 러시아 사람들이 전쟁을 지지하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전쟁이라면 국민들이 왜 지지하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나를 반미주의자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나는 미국에서 경영학 이론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미국에서 나온 경영학 이론들을 살펴보면 그 내용에 경계를 기울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나온 이론들 대부분은 인간을 억압하거나 착취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도 미국에서 나온 이론들, 특히 주주자본주의 이론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 이론들은 억압과 착취가 내재되어 있으며, 주주자본주의 이론을 신봉하는 것은 큰 오류입니다. 독일 사람들이 얘기하는 스테이크 홀더 캐피탈리즘, 즉 이해자 자본주의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채택해야 사회가 올바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경영학에서 가르쳐야 합니다. 부익부 빈익빈 자본주의보다는 협력과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개혁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민주당을 개혁해야 합니다. 개혁된 민주당은 국가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정치, 검찰, 사법, 언론, 교육, 노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현재가 개혁할 시기이며, 그렇지 않으면 국가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할 것입니다.
민주당의 정치인들은 시민들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국회의원이 아닌 우리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민주당을 살리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을 깨워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 계기판에는 1276명의 동시 시청자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강의를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전파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중요한 것은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이 채널을 구독하고,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한 문장만을 통해 비난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맥락을 이해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 민주당 국회의원들 중 상당 부분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혜경 선생님이 강조한 대로, 자신의 수입의 3분의 1은 시민과 사회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한 정치인이 어디에 있는지 현재 상황에서 찾아보아야 합니다.
김현덕 선생님의 말씀처럼, 현 상황을 뛰어넘지 못하면 고인물이 되어 썩을 것입니다.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를 이기고 넘어가야 합니다. 사임하지 말고 이겨내야 한다는 말씀이 맞습니다.
민주당을 살리기 위해 수박들을 척결해야 합니다. 분당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제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재명이 스스로 해야 할 일이고, 좌우지간의 수박들을 척결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홍영표나 김종민, 이상민과 같은 인물들의 과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래경 선생님이 강조하신 대로, 그가 살아온 삶을 보아야 합니다. 김종민이나 이상민이 한 일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지금은 2시간이 넘도록 강의를 들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이혜경 선생님이 조중동에서 언급한 기사나 한결회, 경향신문 등에 실린 기사들을 비판하는 기자들의 부실한 논리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래경 선생님의 말씀과 글을 하나하나 읽어보아야 합니다. 이는 다른 정치경제 이론과 같은 무거운 책이지만, 매우 중요한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수박들이 역풍을 부는 세상에서 그들의 논리를 조선일보와 같은 언론사에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소개한 것처럼, 한심해서 얘들이 하는 꼬라지에 속지 말고, 송갑석은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민주당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에 희망을 가져다줄 수 있는 당은 민주당뿐입니다. 따라서 이재명을 비롯한 민주당을 지원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태도를 갖도록 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마치겠습니다. 제 마음도 아프고, 민주당 개혁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제는 시민들이 일어나서 민주당을 개혁해야 합니다. 상황을 바꿔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에 희망이 없습니다. 정의당이나 국현당과 같은 당에 희망을 걸 것이 아니라, 오직 민주당에만 희망을 걸어야 합니다. 그들이 지금 민주당을 망치고 있는 것을 염려합니다. 지금은 민주당에 힘을 실어주어야 합니다.

정리

이제 강의 마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문재인 왜 검찰 개혁에 실패했는가 검찰 개혁만 실패한 거 아니죠. 모든 개혁은 실패했죠. 검찰 개혁을 포기했는가 이렇게 제목을 해내다가 다 포기하긴 했죠. 그러니까 실패한 거죠. 하여튼 다음 시간에는 문재인 왜 검찰 개혁에 실패했는가 이걸 가지고 여러 선생님들하고 얘기를 나누겠습니다. 제 강의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